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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안신기 연세동곡의학교육원장, 충남의대 초청 강연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6-06-23 조회수 : 41
"AI·정밀의학이 바꾼 건 의사의 정의… 구조 개편에 앞서 교수의 멘탈 모델부터 물어야"
안신기 연세동곡의학교육원장(연세대 의과대학 의학교육학교실 주임교수)이 충남대 의과대학의 초청으로 의학교육 개편을 주제로 강연했다.
안 원장은 6년제 통합 교육과정 개편이 자칫 "새로운 명칭 아래에서 기존의 강의 중심·정보 전달 중심 모델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데 그칠 수 있다고 경고하며, 구조 개편에 앞서 반드시 직시해야 할 세 가지 물음을 제시했다.
첫째, 우리가 길러 내야 할 의사는 누구이며 그 양성을 위한 교육적 필요는 어떻게 재정의되어야 하는가. 둘째, 그 양성을 감당할 교수는 누구이며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새로 익혀야 하는가. 셋째, 한 의과대학이 실제로 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일은 학장에게 어떤 결단과 절차를 요구하는가. 안 원장은 "이 세 물음을 외면한 채 진행되는 모든 개편은 표지만 바뀐 교육과정을 낳을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건너뛴 1·2단계로 돌아가야"… 특이점 앞에 선 의학
강연의 출발점은 David Kern의 6단계 교육과정 개발 모델이었다. 안 원장은 한국 의과대학이 개편 논의에서 정작 가장 가볍게 처리해 온 부분이 1단계(일반적 필요 평가)와 2단계(구체적 필요 평가)라고 지적했다. 인증 기한과 학사 일정에 쫓겨 목표 설정·전략 설계·실행으로 곧장 건너뛴 결과, "표지에는 역량중심 교육과정이라 쓰여 있으나 내용은 여전히 분과 중심 강의와 정답이 정해진 시험으로 채워진 풍경"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직시해야 할 필요는 무엇인가. 안 원장은 인공지능이 이미 임상의 일상에 들어와 있는 도구가 되었고, 다중모드 데이터가 환자를 더 이상 단일 범주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의학 지식의 총량과 갱신 속도가 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금, 요구되는 핵심 역량도 이동했다. "정보를 암기해 재생산하는 능력보다,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읽어 내고 환자의 구체적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며 문제의 본질을 포착하는 분석적·해석적·비판적 사고가 절실해졌다"는 설명이다.
안 원장은 이러한 변화를 점진적 조정으로 흡수될 수 없는 "특이점(singularity)", 곧 단절적 갱신을 요구하는 변화로 규정했다. 그는 "6년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에 대한 답은 6년 뒤의 의사가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지에 종속되어야 하며, 이 관계를 뒤집어 시간표부터 짜는 순간 또 한 번 표지만 바뀐 교육과정을 갖게 된다"고 강조했다.
평균적 환자에서 'n=1'로… "정밀의학은 해석을 더 요구한다"
역량 이동의 진앙으로는 임상의학 자체의 인식론적 전환을 꼽았다. 근거중심의학(EBM)이 본질적으로 '평균적 환자'를 전제하는 반면, 유전체와 다중모드 데이터가 드러내는 환자 간 편차는 그 동질성 전제를 근저에서 흔든다는 것이다. 안 원장은 만성 골수성 백혈병에 대한 글리벡의 작용이 임상 진단명이 아니라 BCR-ABL 양성이라는 기전적 하위집단에 한정되었던 사례를 들며, 임상 진단명이 기전적 진단에 자리를 내준 순간을 정밀의학의 출발점으로 제시했다.
그 종착점은 'n=1'이다. 다만 안 원장은 이를 단일 환자로의 절대적 수렴이 아니라, 비교의 단위가 집단 평균에서 기전적으로 일관된 작은 집단으로 옮아가는 방법론적 경향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그는 결정적 통찰을 짚었다. 어떤 기전을 핵심으로 보고 어떤 변수에 가중을 둘 것인가는 데이터가 스스로 말해 주지 않으며, 하위집단의 정의 자체가 해석적 행위라는 것이다. "정밀의학은 해석적 차원을 없애 주는 마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차원을 더 명시적으로 다룰 것을 요구하는 사유 양식"이라는 명제가 이어졌다.
따라서 길러 내야 할 의사상도 분명해진다. 정해진 진단 범주에 표준 프로토콜을 적용하는 '알고리즘 집행자'가 아니라, 이 환자에게 어떤 기전이 결정적인지를 묻고 어떤 데이터를 왜 우선시하는지 답할 수 있는 '해석적으로 책임지는 임상의'다. 안 원장은 이를 그리스 철학의 세 가지 앎—에피스테메(보편 지식), 테크네(절차적 기술),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에 비추어 정리하며, 에피스테메가 폭발하고 테크네가 자동화로 옮겨 가는 지금 의학교육이 새롭게 정의해야 할 자리는 프로네시스의 형성에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모든 과목을 동시에 바꾸는 일이 답은 아니라며, 해석적 추론은 잘 선택된 몇몇 과목과 임상 경험 안에서 체득되면 다른 맥락에서도 작동하는 사유 양식임을 분명히 했다.
"성공한 학교일수록 변화는 어렵다"… 진짜 장벽은 교수의 정체성
안 원장은 "성공한 학교일수록 변화가 더 어렵다"는 역설을 먼저 짚었다. 우수한 졸업생과 좋은 인증 결과라는 성공 서사 자체가 강력한 변화 저항의 근거가 되며, 변화를 주장하는 쪽은 늘 불리한 입증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교수의 멘탈 모델은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 받은 교육에서 형성되며, 그 모형 위에서 자신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 모형이 옳다는 개인적 증거가 된다. 그는 거꾸로학습·팀바탕학습 같은 새 기법을 외부에서 도입하더라도 "멘탈 모델의 본질적 변화 없이 부가적으로만 얹힌 것은 외력이 사라지면 익숙한 모델로 회귀한다"고 지적했다. 결론은 명확했다. 학생에게 전문직정체성 형성을 기대한다면, 그 가능 조건은 교수에게서 먼저 같은 형성이 일어나는 일이다.
학장의 첫 책무는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일'
안 원장은 교수의 멘탈 모델을 다루는 일을 학장의 책무로 규정하며 Kurt Lewin의 변화관리 모델—해빙·이동·재동결—을 들었다. 한국 의과대학의 개편이 거듭 멈춰 온 자리는 '해빙(unfreezing)' 단계이며, 그 핵심은 기대와 결과의 어긋남을 누적시키는 불일치, 그리고 변화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심리적 안전이라는 설명이다.
"학장이 해빙의 자리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일"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정원 증원이 소규모 학습에 만들어 내는 부담, 분과 중심 교육과 정밀의학 임상 사이의 간격, 졸업생이 AI 환경에서 직면하는 준비 부족 같은 현실을 진단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그 출발점이다. '이동' 단계에 대해서는 전면 시행이 아니라 작은 자리에서 변화를 시연하고 교수를 공동 설계자로 초대할 것을, '재동결'에 대해서는 새 실천을 평가 정책·임용 기준 등 제도에 안착시키는 협력적 과제임을 덧붙였다.
6년제 통합 교육과정, 네 가지 설계 원칙
이어 안 원장은 6년제 통합 교육과정의 설계 원칙 네 가지를 제시했다. △6년을 합산이 아니라 하나의 종단적 필요 기반 교육과정으로 다룰 것 △6년의 시간을 단축이 아니라 학생별 관심·역량 차이에 응답하는 내재적 유연성과 가속 트랙으로 다룰 것 △해석적 추론을 기초의학 첫 강의부터 6년 전반에 시기별로 녹여 넣을 것 △교육과정과 같은 6년의 시간 안에서 교수 형성이 함께 진행되는 평행 교수개발 트랙을 제도화할 것이다. 그는 이 네 원칙이 분리된 작업이 아니라 프로그램적 평가라는 결합조직을 통해 서로를 지지한다고 설명했다.
"좋은 의도와 검증된 방법론이 곧 좋은 결과는 아니다"
안 원장은 연세의대가 네 차례의 교육과정 개편(CDP)을 통과하며 얻은 교훈도 솔직하게 공유했다. 큰 기대를 걸었던 문제기반학습(PBL)이 한국의 교육문화 및 학생의 학습 방식과 어긋나 기대한 모양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경험을 들며, "좋은 의도와 검증된 방법론이 그대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얻은 지혜는 자기 학교의 교육문화와 출발 조건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자리에서, 어떤 이론을 어떤 결로 적용할 것인가를 묻는 분별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을 함께 통과하는 데 결정적인 한 가지로는 거듭된 커뮤니케이션을 꼽았다.
강연을 맺으며 안 원장은 "어느 학교도 이 벽을 피해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원과 인프라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차이가 변화를 미루는 이유로 자리를 잡을 때 진단의 자리는 흐려진다는 것이다. 그는 "진짜 질문은 자원이 충분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지금 있는 조건 안에서 무엇을 문제로 형식화하고 누가 먼저 해빙의 한 자리를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이번 강연은 연세의대의 교육과정 개편 경험을 다른 대학들도 참고할 수 있도록 성공뿐 아니라 시행착오까지 포함한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폭넓게 공유하는 장이 되었다. 이는 '한 대학의 교육 혁신 경험을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공유하는 개방형 교육 리더십'과 맞닿아 있다. 한 의과대학이 축적한 성공과 시행착오를 검증된 교육 자산으로 환원하여 다른 대학의 개편 여정에 참고점을 제공하는 지식 공유라는 의의가 있다.

